
PLAYING C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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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e
Sherlock Holmes
SHERLOCK
♠Spade Ace♠
* 읽기 전 보시면 좋을 말들
-
포커의 기본적인 용어와 텍사스 홀덤의 대략적인 룰을 읽어보고 오실 것을 추천드립니다. 물론 자세히 알지 않아도 크게 지장은 없지만,
- Check(체크: 판돈을 올리는 것 없이 턴을 넘기는 것)
- Raise(레이즈: 판돈을 올리는 것)
- Call(콜: 상대가 올린 판돈을 받아 자신도 그 만큼 내는 것)
- Reraise(리레이즈: 상대가 올린 판돈에 자신이 또 판돈을 올리는 것)
- Fold(폴드: 카드를 엎는 것, 게임에서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것)
정도는 알아 두시는 것이 매끄러운 이해에 도움이 될 듯 합니다. -
의학/약학적인 지식에 대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최대한 여러 자료들을 참고했으나, 관련 전공자가 아니기에 양해 부탁드립니다.
셜록은 부유하는 의식 사이에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한 인영의 초상을 발견했다. 호흡이 걷잡을 수 없이 느려지고, 부족해진 산소에 뇌도 평소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지 앞의 인물이 누구인지를 분간하는데도 수 초가 넘게 걸렸다.
"아ㅇ..."
"쉬이.. 괜찮아."
그가 발을 툭 치자 낡은 목재가 퉁- 하고 울리며 세상이 뒤로 기울더니 시릴 정도로 차가운 철제의 오돌토돌한 표면이 뺨 위로 거칠게 쏟아졌다. 끈적하게 축축한 액체가 기분 나쁘게 머리카락 사이로 늘러붙고, 제 머리의 무게에 짓눌려 떠지지 않는 한쪽 눈 대신 다른 쪽 눈꺼풀을 힘겹게 열어재끼며 앞의 인물에 초점을 맞추려 애썼다.
"...를 말해. 그럼 모든 게 편해질 거야."
곧게 뻗은 창백한 손가락이 광대뼈를 타고 쓸어 내려가는 섬뜩한 감각이 생경하게 올라오자 셜록의 입에서 원치 않은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는 눈앞의 입술과 혀 끝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지만 웅웅대는 머리는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얼굴을 붙잡고 있던 손이 떨어지며 고개가 힘없이 흔들리고, 뒤이어 자신의 소매가 걷어 올려져 팔 안쪽에 무언가 따끔거리는 감각이 느껴짐과 동시에 차가운 액체가 온 몸을 잠식하듯 혈관을 타고 퍼져나갔다.
저항할 틈도 없이, 제 손발이 움직일 기력을 빼앗아가는 검은 나락에 붙들려, 끝없는 암전 속으로 잠기어, 셜록은, 추락했다.
쿵.
끈적거리는 졸음에서 서서히 벗어나듯 눈을 뜨자 그의 앞에 보인 것은 천장이었다. 너무나 익숙하고, 그리웠기에 오히려 더 어색하게 느껴지는, 221B 플랫의 자신의 방 천장. 몸 아래 깔려있는 부드러운 침구는 포근한 냄새로 자신을 감싸주었지만, 돌아오는 의식과 함께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두통으로부터까지 보호해줄 수는 없었다. 동쪽에서 기울어져 들어오는 햇빛으로 미루어 보아 오전 8시에서 9시 사이인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방문 밖에서 조용히 들려오는 소리들은,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한, 찻물이 끓어오르고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조금 늦은 아침을 준비하는 존의 소리였다. 존이 플랫에,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어떻게 이 플랫에, 잠깐, 내가 어떻게 런던으로 돌아왔지?
주위로부터 물밀 듯이 쏟아 들어오는 감각과 그에 따른 정보들을 잠시 한쪽으로 치워두고선, 자신의 마지막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바츠에서의 추락 이후, 자신은 모리아티의 범죄망을 완전히 해체하기 위해 MI5의 지원을 - 정확히는 마이크로프트의 지원을 - 받아 해외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연결고리였던, 정경계 깊숙이 엮여 있던 모페르튀 남작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세르비아군 내부에 잠입했었다. 그 다음엔 어떻게 되었지..? 셜록은 난생 처음으로 마인드 펠리스 앞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 채 방황했다. 기억의 마지막 부분이 통째로 들어낸 듯 사라져있었다.
가설 1. 자신은 현재 꿈을 꾸고 있다. 가설 2. 모든 것이 정리되어 자신은 정말로 런던으로 돌아왔다. 가설 3. 분석결과. 자신의 기억력에 문제가 생겼다.
"셜록?" 두 번의 노크에 뒤따라 열린 방문 사이로 존의 얼굴이 들어왔다. 정말로, 존이었다. "오, 일어났네. 몸은 괜찮아?"
"무슨 일이 있었나?"
셜록이 여전히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일어서며 최대한 자연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식탁 위에는 자신의 현미경이 한쪽으로 밀어진 채 간단한 아침 식사가 준비되고 있었고, 거실에는 이제 막 샤워를 마쳤는지 존의 가운이 의자 등받이 위에 걸쳐진 채 있었다. 마치 2년 전으로 시간을 돌려 그대로 돌아간 듯한 풍경이었다.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잖아. 혼자 뛰쳐나가 놓고선 길바닥에 쓰러져서 행인 분이 신고해 주셨다고. 경감님이 집까지 데려다주셨잖아, 기억 안 나?" 존이 그릇에 시리얼을 쏟아 넣고 그 위에 우유를 부으며 빈정대듯 말했다.
"사건? 무슨 사건?"
"...마약 밀매단 말이야. 장난하는 거면 이쯤에서 그만둬. 무덤에서 살아 돌아온 지 이틀도 채 안 됐는데 이제는 기억상실이야?"
이틀이라니. 셜록은 사라진 기억의 양이 얼마나 될 것인지 가늠하며 새롭게 들어온 정보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1. 자신은 이틀 전에 런던에 돌아왔다. 정확히는 베이커 가에 돌아왔다. 2. 존과 재회해서, 다시 플랫메이트로 살기 시작했다. 이게 만약 꿈이라면 깨어나기 싫을 정도였다. 3. 자신은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다. 존의 말에 따르면, 정확히는 마약 밀매단에 관한. 셜록은 거실에 들어서며 스치듯 본 사건 파일 위의 활자들을 힐끔거리며 그 사기단이 마약 밀매상을 가장한 강도와 더불어, 불법 사제 약물 제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파일의 두께로 보아 꽤나 오랜 기간 경찰의 골치를 썩였음에도 아직 수사에 별다른 진척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미안, 그만두지."
셜록은 자신에게 문제가 생겼단 사실을 - 아직은 문제라고 하기엔 애매했으나 - 존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존은 미심쩍어 하는 눈치였지만 셜록이 자발적으로 말하기 전까지 얘기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존이 아침을 먹고, 셜록은 자신의 의자에 앉아 사건 일지를 뒤적거리며 자신의 플랫메이트를 힐끔거리는 어색한 침묵이 슬슬 지겨워질 즈음, 둔탁한 구두 굽 소리가 계단을 울리더니 - 걸음걸이로 보아 레스트레이드였다 - 플랫 문이 벌컥 열렸다.
"이번엔 살인 사건이야."
그가 경감을 보고 평소와 같이 튀어 나가듯 일어나려 했으나 머릿속을 강타하는듯한 현기증에 비틀거리며 잠시 의자에 기대어 설 수밖에 없었다.
"...뭔가 나온 게 있나요?"
"신고가 들어오고 거의 곧바로 자네한테 왔네. 아직 밝혀진 건 거의 없어. 피해자의 신원조차 파악이 안 되서 애를 먹고 있는 중이야. 자네 괜찮나?"
존의 시선도 자기에게로 향하며 무언가 말하려 하는 자세를 보이자, 셜록은 울렁이는 속을 애써 무시한 채 몸을 바로 피고선, 존을 지나쳐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먼저 가 계시면 뒤따라가죠."
약 삼십 분 뒤, 그들은 베이커 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런던의 오래된 한 건물 지하실로 내려가고 있었다.
"피해자는 30대 남성, 아직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꽤나 비싼 브랜드의 양복을 입었더군. 사건 현장에서도 발견된 게 거의 없어. 마치 범인이 연극 무대를 꾸며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셜록이 별 대꾸 없이 경감의 말을 흘려들으며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방 안으로 들어섰다. 창문 없는 방에, 천장에 달린 필라멘트 전구가 약하게 노란 빛으로 발광하며 방 한가운데 놓인 동그란 탁자 위를 비추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뒤집힌 카드들이 양쪽 끝에, 마치 포커라도 치고 있었던 것 마냥 놓여 있었다. '프리 플랍', 피해자 앞에 한 장, 반대편엔 두 장, 아직 커뮤니티 카드는 깔리지 않았으나, 피해자 쪽의 카드 한 장이 비어있었다. 능숙한 솜씨로 한 손에 라텍스 장갑을 끼고선 탁자로 다가가 한 장을 뒤집어 보았지만 아무런 문양 없이 흰 공백만 있을 뿐이었다. 나머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똑같이 백지일 것이다. 오, 재밌어지기 시작하네, 패를 알아맞혀 보라는 건가. 셜록은 오랜만에 방문하는 사건 현장의 모든 장면에서 흥분의 전율이 온몸을 타고 오르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알렉산더 커닝험,"
그가 탁자에서 몸을 돌려 시체의 얼굴을 보자마자 떠오른 알 수 없는 불쾌감에 인상을 구기며 이름 하나를 툭 내뱉었다.
"아는 사람인가?" 레스트레이드가 놀란 듯 반문했다.
"커닝험 가의 장남입니다. 여기서 한 시간 반 쯤 떨어진 라이기트에 본가가 있어요. 이 정도면 신원 파악에는 충분할 것 같군요."
대답을 피하는 듯한 그의 모습에 문 너머 팔짱을 낀 채로 보고있던 도노반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는 소리가 나왔지만, 셜록은 그를 무시한 채 주머니에서 확대경을 꺼내 조사를 이어나갔다. 테일러 샵에서 맞춤 제작된 양복에, 차 한 대 가격을 호가할 것 같은 손목시계를 거쳐,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었을 손톱 끝이 어딘가에 뜯긴 듯 갈라져 있는 것이 보였다. 손가락을 들어 자세히 살펴 보니 손끝 피부도 까슬하게 일어나 있었다. 허리를 숙이자 진흙 한 점 없이 깔끔하게 광이 나 있는 구두의 뒤축에 세로로 흠이 나 있었고, 다시 상체를 들어 안면을 관찰하자 말라서 갈라지고 있는 입술이 깔끔하게 다물린 것과 달리 턱 끝에서는 침이 말라붙은듯한 자국이 있었다. 고개를 기울여 냄새를 맡고선 코를 찡그린 뒤, 장갑을 낀 쪽으로 조심스럽게 시체의 입을 벌리고 다른 손은 뒤로 뻗으며 혼잣말하듯 내뱉었다. "핀셋," 손에 차가운 금속이 다소 성의 없게 올려졌지만 셜록은 별 신경 쓰지 않고 벌려진 입 안에서 찢어진 종이를 꺼내 증거물 라벨이 붙어 있는 봉투에 넣었다.
"다른 곳에서 살해당한 뒤 여기로 옮긴 겁니다." 셜록이 장갑을 벗으며 레스트레이드에게 증거물 봉투를 넘겼다. "구두 뒤축에 뒤에서 끌려가는 스크레치가 나 있는 데다가, 옷의 자국을 보면 분명 어딘가에서 쓰러져 있었어요. 이 자세로 죽은 게 아닙니다. 증거를 지우려고 피해자 손가락을 에탄올로 소독했는지 피부 끝이 미세하게 닳아 있더군요. 손톱 끝이 부러진 모양을 봤을 때 저항하면서 범인의 몸에 상처가 났을 겁니다. 사인은 아마 마약 과다투여로 인한 쇼크사일 거예요. 목 오른쪽에 주삿바늘이 있고, 범인이 지우려 했지만 입가에 경련으로 인한 토사물 흔적이 있네요. 혈액검사를 해서 어떤 약을 썼는지 이전의 피해자들과 비교해 보세요. 마약 밀매단이 이제는 본격적으로 일을 벌이기 시작하고 있는 겁니다. 피해자의 입 안에서 카드 조각이 나왔어요. 아마 원래 자기 패 중 하나였겠죠."
"자기 패라니?" 경감이 셜록의 말을 정신없이 받아적다 의문을 표했다.
"포커 게임이요. 포커 몰라요? 테이블 위에 피해자 쪽에는 카드가 한 장밖에 없잖아요. 나머지 한 장을 숨겨놓고 누군가 찾아내길 바란 겁니다." '너가 찾아내길 바란 거겠지, 멍청한 경찰들이 아니라.' 순간 셜록은 머릿속에서 속삭이는 익숙한 하이톤에 인상을 찌푸렸으나, 머리를 살짝 흔들어서 떨쳐냈다. 지금은 적절한 타이밍이 아니었다.
"그 카드가 의미가 무슨 있는 건가?" 경감이 눈썹을 찌푸렸다.
"스페이드 에이스요."
"그러니까 무슨 의미인데," 존이 감정을 억누르는 데 한계를 느끼는 듯한 경감을 대신해 적절한 질문을 던졌다.
순간 셜록이 지어 보인 것은, 흔히 이쯤에서 보여주곤 했던 굉장히 오만한 듯한, 이 단순한 걸 왜 모르냐는 표정이 아니었다. 마치 지금껏 표면에 드러내던 감정은 허울이었던 것 마냥, 그 가면이 이제야 무너져 내려 진실된 표정을 드러낸 듯했다. 경감과 존 사이 어딘가를 바라보며, 셜록은 이제 막 시한부 선고를 받은 말기 암 환자 같은 얼굴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죽음이요,"
그리고 그는 검은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방을 벗어났다.
셜록은 몸이 앞으로 쏠리는 듯한 충격에 생각의 늪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 자신은 어떻게 택시를 잡았는지 기억하지도 못했으나 - 택시를 타고 있었고, 옆자리는 비어 있었으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풍경에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성 바톨로뮤 병원도, 베이커 가도 아닌 런던의 어느 외딴 골목길 앞에 멈춰서 자신이 내리기를 종용하는듯한 택시기사에 한마디를 하려 했으나, 순간 차창을 똑똑이며 그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남성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전직 군인, 용병 경험 있음, 게이, 허리춤에 Zastava M70, 세르비아 제식 권총, 마약 중독, 심혈관 질환... 차문이 열리고 마치 에스코트라도 해 주듯 내민 그의 손에 셜록은 속으로 헛웃음을 내뱉고선 택시 밖으로 빠져나왔다.
"안녕,"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남자를 따라 어느 버려진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아일랜드 억양의 하이톤이 반겨왔다. "놀랐어? 내가 좀 극적인 걸 좋아하는 편이라."
지난 2년간 한순간도 잊지 못했던 목소리, 모리아티, 분명 머리에 총알이 관통했음에도, 살아있었다. 아니, 애초에 그것은 속임수였을 가능성이 커졌다. 셜록은 햇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아 한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두컴컴한 건물 안에서 홀로 빛나는 샛노란 필라멘트 전구와, 현장에 있던 것과 거의 똑같이 놓여 있는 탁자를 발견했다. 모리아티는 피해자가 있었던 자리의 맞은편에 앉아 손 끝에서 카드패를 돌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내 친구들이 너무 못살게 굴었었지, 용서해, 충분히 혼내주고 오는 길이니까."
"새로운 똘마니라도 만들었나 보군."
"네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강아지가 여간 부러워서 말이야."
모리아티가 의자에 앉은 채로 앞의 빈 의자에 손짓했지만 셜록은 무시한 채 뒷짐을 지며 그 자리에 서 있기로 결정했다. 경계하는듯한 셜록의 모습에 모리아티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으쓱하고선 다시 말했다.
"2년이네, 그동안 재밌게 놀았어?"
"아주 멀쩡해 보이네."
"너도 속인 건 마찬가지잖아."
"이제 네 범죄망은 다 해체됐어."
"오, 순진한 셜록. 설마 그게 전부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모리아티가 다시 한 번 의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제 슬슬 본게임에 들어가야지. 너랑 나. 솔직히 인정해, 너도 그리워했잖아."
"알렉산더 커닝험," 셜록이 마지못해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말했다. 모리아티는 셜록의 대답이 만족스럽다는듯한 미소를 지으며 앞에 놓인 카드패를 집어들었다. "네가 바로 알아차릴 줄 알았어."
카드패가 섞이는 경쾌한 소리가 공간에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반으로 나누고, 끝을 맞물리게 해 엄지 끝으로 동그랗게 밀자 촤라락-, 하고 꽤 능숙한 솜씨로 하나로 다시 뭉쳐지는 것을 보며 셜록이 말했다.
"전직 영국 말단 관료였지. 말로는 말단이지만 사실상 영국을 움직이던 몇 개의 핵심 인사 중 하나였어. 문제는 정보를 빼다 파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거였지만. 상속 명단에서 제외되고 남은 재산은 탕진되고 있는데 자기는 도박광에 마약꾼이었거든."
"좋아, 그리고?" 모리아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약상의 주요 고객 중 하나였지. 죽이려고 작정했다면 약을 바꿔치기 하거나 소량의 독을 넣어서 서서히 죽이는 게 훨씬 깔끔했을 텐데 왜 이런 지저분한 방법을 썼지?"
"알아맞혀 봐."
다 섞인 카드가 테이블 가운데에 올려지고, 셜록은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며 앞에 있는 남자의 눈동자가 노란 조명에 발광하며 갈색으로 빛나는 것을 보았다. 모리아티는 자신이 게임의 룰을 정하고, 그 룰에 따라 행동한다. 그리고 이번에 자신이 그와 하고 있는 것은 포커 게임이었다. 자신에게 유리한 인물을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죽여놓고는 보란 듯이 전시했다. 각각 두 장의 카드들, 전부 백지였으나, 상징과 은유로 점철된, 이 게임은 포커를 빙자한 체스게임에 더 가까웠다.
"프리플랍 레이즈, 판돈을 올린 거야."
"맞았어. 콜? 혹은 리레이즈?"
"폴드는?"
"여기에 폴드는 없어. 단 한 판뿐인 게임이거든. 아 물론, 굳이 하고 싶다면 말리진 않을게." 모리아티가 저 멀리 자세를 잡고 서 있는 남자를 힐끗거리며 말했다. 셜록은 굳이 시선을 돌리지 않아도 그가 허리춤에 있는 권총을 만지작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난 내가 어떤 카드를 받았는지도 알지 못하는데,"
"넌 이미 알고 있어. 셜록. 그래서, 콜? 혹은 리레이즈?"
셜록은 자신에게 별다른 선택권이 없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콜"
좋아, 모리아티가 섬뜩하게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손을 뻗어 카드 세 장을 차례로 뒤집어 탁자 가운데에 올려놓으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 작고 귀여운 심장들이네." 하트 5, 하트 9, 하트 10, 첫 세 장인 플롭 카드부터 문양이 모두 같으니 플러시가 있을 가능성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었다.
"네가 그날 했던 말을 잊지 않았겠지. 셜록, 불타버릴 준비가 되었다는 말." 그동안의 가식적인 말투를 싹 빼고선, 모리아티가 목소리를 내리깐 채 또박또박 말했다. "난 네 심장을 불태울 거야."
등 뒤에서 차 한 대가 멈춰서며 타이어가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리자, 그가 다시 미소를 그리며 열려있는 건물 입구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택시 타, 이번엔 제대로 데려다줄 거야. 약속할게."
셜록은 잠시동안 앞의 남자를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을 나섰다.
다시 베이커 가에 도착했을 때, 셜록은 플랫 한가운데에서 우산에 기대어 서 있는 마이크로프트를 발견하곤 인상을 찌푸렸다. 존이 아직까지도 현장에서 도착하지 않았다는 점이 의아했으나, 당장 제 앞에 있는 존재가 불만스러웠기에, 그 문제에 신경을 쓸 새가 없었다.
"왜 그러고 서 있는건데. 좀 앉든지 해. 꼴사납게." 셜록이 신경질적으로 스카프를 풀어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진 채 자신의 의자에 앉으며 투덜거렸다.
"돌아오자마자 아주 바쁜 것 같구나." 마이크로프트가 셜록의 말은 무시한 채 플랫을 서성거리며 입을 열었다. "무언가 이상한 점은 없었니?"
"그 잘나신 요원들로 다 지켜보고 있었을 거 아니야." 셜록이 다시금 지끈거려오는 머리를 붙잡고선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세르비아에서, 마지막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하고 있니?"
예상치 못한 질문에 셜록의 몸이 당황하며 뻣뻣해졌다. 고개를 돌리자 마이크로프트의 자신을 꿰뚫어 보듯 쳐다보는 두 눈과 마주쳤다. 세르비아에서, 무언가 잘못됬던 게 분명했다. 분명히 자신은 모페르튀 사건을 마무리한 기억이 없었기에, 도중에 일이 틀어져서 갑작스럽게 되돌아오게 된 것이리라.
"정말 그렇게 확신할 수 있겠니? 동생아."
자신의 생각을 읽고있는 듯한 마이크로프트의 말투에 짜증이 나기 시작한 셜록이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이제 사건 파일을 뒤적거리기 시작한 자신의 형 앞으로 다가섰다. "나한텐, 아무런, 이상도, 없어." 그가 으르렁거리며 말 마디마다 힘을 주어 내뱉었다.
"지금 이 대화에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했나 보구나."
마이크로프트가 파일에서 시선을 돌려 셜록과 얼굴을 마주했다.
"넌 환각을 보고 있단다. 셜록."
"...셜록?"
단단하지만, 걱정하는듯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비집고 들려오자 마이크로프트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존이 대신해서 서 있었다. 셜록은 갑작스런 충격에 아무런 대답도 떠올리지 못하고 그저 몇 초간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심각하게 바라보는 존의 얼굴과 마이크로프트가 있던 허공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방금, 뭘 본 거야?"
존의 질문에 방황하던 셜록의 초점이 맞춰지며 제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지만, 여전히 그의 입은 다물린 상태였다.
"그래, 말은 제대로 해야겠지. 방금, 누구랑 대화한 거야?"
"..."
"...혹시 다시 시작한 거야?"
속에서 올라오는 화를 억누르려는 건지, 혹은 표출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존의 목소리에 점차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넌 환각을 보고 있었잖아. 이 정도까지 진행 속도가 빠른 병은 내가 알기론 없어. 네가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도시 한복판을 뛰어다니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까. 뇌진탕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어젯밤에 외상의 흔적이 없는 것도 확인했거든. 그럼, 답은 하나지." 존이 말을 잠시 끊고 숨을 들이쉬며 최대한 침착하게 질문했다. "약에 손댔어?"
셜록은 이제 존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마치 사건 현장에서 현행범으로 발각된 범죄자마냥, 그는 긍정도 부정도 않은 채 침묵으로 일관하며 묵비권을 행사헀다. 그는 존에게 이런 모습을 결코 보이고 싶지 않았다.
"셜록,"
"..아니야."
"그럼 설명해봐."
"돌아온 이후로 한 번도 손댄 적 없어."
"돌아온 이후," 이제 존의 어투는 거의 취조에 가까웠다. "그럼 그 전엔 얼마나 했는데."
셜록이 다시 입을 다물며 고개를 돌리려 하자, 존이 최대한 말투를 누그러트리며 다시 말했다. "그래, 그건 말 안 해줘도 되니까 뭘 했는지만 말해. 내가 약이라도 지어 올 테니까. 지금 금단증세가 시작된 거잖아."
둘 사이의 침묵으로 물든 긴장감을 깨트린 것은 셜록의 핸드폰이었다. 경쾌한 알람이 울리며 문자가 왔음을 알리자, 셜록이 코트 주머니에서 꺼내 확인하곤 무심하게 읽으며 존을 지나쳐 플랫 밖으로 향했다.
"레스트레이드야. 부검 결과가 나왔다는군."
셜록-, 존이 뒤늦게 그를 부르며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이미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한 후였다.
셜록은 바츠에 도착하기까지 30분도 더 넘는 시간동안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차창에 얼굴이 닿을 듯이 택시 뒷좌석의 한 구석에 몸을 구겨넣고선, 아무런 의미 없이 주변을 빠르게 스쳐 가는 런던의 거리만 바라볼 뿐이었다. 보다 정확히는, 시선만 창 밖의 어딘가에 두고 있었다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이제 그의 손가락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고, 머리 한가운데를 쪼개는 듯한 두통은 슬슬 거슬리기 시작할 정도였으며, 택시 안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온갖 종류의 향수와 이전 승객들의 흔적에 속이 점점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이 증상은 그 누구보다 셜록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금단증세. 하지만 셜록은 적어도, 아, 물론 런던을 떠난 지 5개월이 지난 시점부터 다시 시작하긴 했었으나, 이 정도까지 후유증이 남을 만큼 하지는 않았었다. 그는 그 자신의 주장만큼이나 중독자라기보단 그저 그 약의 효과들을 필요할 때 이용하는 편에 더 가까웠고, 특히나 세르비아 작전에 착수한 이후부터는 온갖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느라 더 이상 손도 대지 못했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이상했다. 런던에 돌아온 지 이틀째에 갑자기 금단증상이 시작됐다? 앞뒤가 맞지 않았다.
이 의문의 해답은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에 있을 것이었다. 세르비아에서 있었던 마지막 일이나, 어제의 일, 혹은 그 둘 모두에서 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부검실에는 이미 레스트레이드와 몰리가 와 있었다. 그들은 시체 하나를 앞에 두고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셜록과 존을 보고선 대화를 잠시 멈췄다.
"사인이 뭐죠?" 셜록이 몰리가 건네는 부검 보고서를 받아들며 물었다. 몰리는 감격으로 뒤덮인 재회의 인사를 나누고 싶어하는 눈치였으나, 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얼굴 가득 피어오른 기쁨을 감추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직접적인 사인은 약물 복용으로 인한 쇼크사에요. 지난번의 두 구의 시체는 아편 계열이 검출되었지만, 이번에는 코카인 테스트에서 양성이 나왔어요. 다만 특이한 것은 흥분 작용을 일으키는 코카인과는 다르게 호흡이 먼저 정지되었다는 거예요. 외부압력에 의한 질식사의 흔적도 없고, 구토물이 기관지를 막은 흔적도 없어서, 중추신경계에 무언가 작용했다고 의심해 볼 수 있죠."
몰리가 알렉산더 오른쪽에 놓여있던 파일 두 개를 추가로 건네주며 말을 이어나갔다. 오전에 사건 보고서에서 부검 요약본을 보긴 했었지만, 혹시 단서가 될 지 모를 사소한 정보들을 확인하기 위해 셜록이 빠르게 훑어보기 시작했다. 4일 전과, 약 일 주 전에 런던 교외에서 각각 발견된 두 구의 무연고자 시신이었다.
"이전의 시체에서도 이상한 점은 있었어요. 이미 아시겠지만, 독극물 검사에서 코카인과 아편제가 검출되었다고 그게 직접적인 사인인지는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수상했던 점은 너무 깔끔했다는 거에요. 보통 마약 과다복용으로 들어오는 시체들을 보면 대부분 온몸이 쓰레기 소굴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망가져서 오는데, 이 둘은 그런 게 없었거든요. 물론 약에 불순물이 많이 섞였는지 혈액이 지저분한 편이긴 했지만, 중독 초기에 자제력을 읽고 과다투여를 했거나, 혹은 약에 섞여 있는 무언가가 작용해서 사망한 거라 볼 수 있는 거죠."
"후자일 겁니다. 그 둘은 약쟁이가 아니었어요. 물론 2년 전의 이야기지만,"
"그 사람들도 아는 사람들이야?" 어느새 셜록의 어깨 너머로 보고서를 보고 있는 존이 셜록의 말에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세 명의 피해자 모두 셜록과 안면이 있다는 사실에다가, 그가 런던에 돌아온 직후 범행 수법이 바뀌었다는 점은, 존 왓슨이 보기에도 충분히 의심스러울 만한 정황이었다.
"...2년 전에 내 위장 죽음에 도움을 줬던 노숙자들이야."
셜록의 대답으로 인해 둘 사이에 어색하게 가라앉은 침묵 사이로 몰리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아직... 검사가 완전히 끝나지 않아서 어떤 약물이 추가로 더 나올지는 아직 알 수 없어요. 급한 사건으로 보여서 일부 마약류만 먼저 진행했거든요. 이전 시체들은 보존 상태가 워낙에 좋지 않아서 쓸만한 결과를 얻을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뒤에서 팔짱을 낀 채로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레스트레이드가 대화가 얼추 마무리되었다고 시작했는지,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다가왔다. "그래서, 셜록, 혹시 용의자를 특정지을 수 있을 만한 건 없나? 아무거나 좋아."
"범인은 2인조에요. 한 사람은 노련한 베테랑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아마추어입니다. 둘이 손발이 잘 맞아 보이지는 않지만요. 이전의 두 구의 시체는 아마추어의 작품이에요. 아주 더럽죠. 그런데 이번에는 아주 깔끔해요. 아마 이전에는 아마추어 쪽이 독단적으로 일을 벌였을 겁니다. 손 끝까지 저렇게 에탄올 소독을 할 정도로 꼼꼼한 성격이 그런 쓰레기 같은 약을 허락해 줬을 리가 없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마지막에 일이 꼬였던 게 분명합니다," 셜록이 시체가 놓여진 테이블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피해자의 목에 있는 주삿바늘을 가리켰다. "아마 피해자의 저항을 저지하려다가 아마추어 쪽이 실수로 과다투여를 한 게 틀림없어요"
"그럼 이번에는 그 베테랑 쪽이 왜 갑자기 나서기 시작한 거지?"
"무언가 상황이 바뀌었거든요. 커닝험은 마약상의 주요 고객에다가 약을 빼돌릴 수 있는 루트를 제공한 사람입니다. 유용한 인물을 아무런 이유 없이 이렇게 했을 리가 없잖아요."
"...커닝험도 연루되어 있었다는 말인가?"
"아마추어 쪽은 아직 20대에 남성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정도 덩치가 있는 사람을 끌고 가는 데 크게 힘을 들이지 않았으니 키도 꽤 크겠군요. 베테랑 쪽은 약리학적 지식이 풍부하고, 관련 물자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아마 의약학 계열 종사자이면서 어느 정도 경력이 있을 거예요. 근처 병원이나 약국에서 근무하면서, 최근 몇 주 사이에 이직이나 퇴직을 했을 겁니다."
"런던 안에 있는 병원만 몇 개인데," 레스트레이드가 머리를 한 손으로 감싸며 중얼거렸다.
"커닝험 가의 차녀가 엑튼 제약 회사의 오너이고, 알렉산더도 그곳 초빙이사로 근무한 이력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약을 납품받은 곳부터 찾아보시죠."
"그래... 일단 명단이 추려지면 연락하지." 경감이 어딘가로 통화를 걸면서 그들에게 빠르게 인사를 건넨 뒤 바쁘게 발걸음을 옮겼다. 셜록은 그가 부검실 밖을 빠져나가는 것을 힐끔 쳐다보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손가락을 빠르게 놀리기 시작했다. 잠시 뒤 삐링- 하며 울리는 문자음에 작게 탄성을 내지르더니 몰리에게 검사 결과를 알려줄 것을 부탁하고선, 그도 밖으로 움직이며 존에게 물었다.
"배 안 고픈가?"
존은 셜록의 의도가 화해인지, 순전한 식사인지 고민하는 것 같았으나, 작게 헛웃음을 내뱉더니 셜록의 뒤를 쫓았다.
"차이나 푸드로 하지."
"부프레노르핀이랑 날록손이야.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거야."
존이 의자 위에 몸을 욱여넣다싶이 웅크려서 머리를 붙잡고 있는 남자에게 두 알의 정제약과 물을 건네며 말했다. 이제 그의 두통은 기나긴 금단증세의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셜록은 눈을 굴리며 불만스럽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으나, 단호한 존의 태도에 결국 약을 받아 입에 털어넣고 삼켰다.
"그래서, 그 얘기는 안 해줄 거야?" 존이 팔걸이 위에 두 손을 얹으며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셜록은 그가 어떤 말을 꺼내려 하는지, 그리고 자신으로부터 원하는 답을 얻어내기 전까지 결코 물러서지 않으리란 점을 쉽게 알 수 있었지만, 이 대화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마지막 발악을 시도했다.
"벌써 확인된 피해자만 셋이야. 빨리 이 사건을 해결하지 않-"
"셜록." 존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딱딱해진 어투로 보아 인내의 제스쳐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셜록은 존의 화를 또다시 돋우고 싶지 않았기에, 침착하게 숨을 한 번 들이쉰 뒤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했다. 항복의 표시였다.
"2년 전에, 왜 그랬던 거야?"
자신의 머릿속에서 수도 없이 예상했던 질문 그대로 존에 입에서 나오는 것을 보자 셜록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모리아티의 저격수가 있었어," 셜록이 머뭇거리자 존이 굳었던 표정을 한층 풀며 그가 말을 잇도록 했다. "너랑, 레스트레이드, 그리고 허드슨 부인."
"세 명의 최고의 킬러들, 그게 그것 때문이었던 거군." 존이 한 손으로 무릎을 탁 하고 치며 말했다.
"완벽하게 속였어야만 했어. 그렇지 않으면..."
"너의 유일한 친구 세 명이 모두 죽게 될 테니까."
순간 셜록이 존의 모습에서 겹쳐 본 것은 모리아티의 얼굴이었다. 존이 이 대화를 알 수가 없을 텐데. 셜록은 마치 자신이 2년 전 바츠 병원에 옥상에 다시 한번 올라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때 자신과 모리아티 사이에서 일어난 모든 행위들과, 둘의 입에서 나온 모든 음절 하나하나까지, 그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셜록은 그 생생한 기억 속 한가운데에서 튀어나온 듯한 존의 한 마디에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옥상에서 발생했던 모든 일들은 마이크로프트의 주도하에 완벽하게 정리되었다. 적어도 완벽하게 정리된 것으로, 셜록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추락 직전 뒤로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던 핸드폰도, 모리아티나 마이크로프트와의 모든 문자 기록이 삭제되었고 - 물론 존의 증언을 증명해주기 위한 통화기록은 남겨져 있었지만 -, 모리아티의 핸드폰도 겉보기엔 똑같은 다른 것으로 교체되었으며, 원래의 것은 마이크로프트의 팀원들이 최대한 모든 정보를 빼내어, 자신의 '모리아티 범죄망 무너뜨리기' 작전에 상당한 도움을 제공했다. 하지만 어떻게 존이, 사고 직후 그의 심리 상태를 고려해 경찰에게 제대로 된 사건 보고서도 전달받지 못한, 그리고 지금 자신에게 그날 일에 대한 경위를 물어보고 있는 존이, 그 대화를 알고 있다는 듯 말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애초에, 왜 이 대화를 시작하게 된 것이었지? 지금껏 완벽하게 존의 물음을 막아두고 있었는-
"...내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왔지?" 순간 셜록의 머릿속에 떠오른, 가장 근본적인 의문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대화의 맥락을 무시하고 갑작스럽게 들어오는 그의 질문에 존의 표정이 굳어갔다.
"내가 어떻게 플랫에 들어와서 여기에 와서 앉았는지에 대한 기억이 없어."
셜록이 갑자기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출입구까지 걸어갔다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겨 원래 있던 자신의 의자 앞까지 되돌아오며 눈살을 찌푸렸다. 왜 지금껏 이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일까? 셜록은 존의 갑작스런 질문 이전의 대화를, 아니 애초에 어떻게 자신이 이곳에 도착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억의 단절, 뇌 기능의 손상? 알약들, 헤로인 중독 치료제, 자신이 헤로인에 손을 댔었나? 애초에, 존에게 말한 적이 있었나? 존, 존, 존의 태도, 존의 말... 자신의 기억... 존의 말들...
"오-," 이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단 한 가지 사실에 대한 깨달음에 그가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이것도... 환각이로군.
셜록은 다시 눈을 떴다. 어둠이 짙게 깔린 플랫에는 자신 외에 아무도 없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아 푸르스름한 어둠이 도시를 집어삼킨 듯 안개가 뒤덮인 런던을 달리던 택시 한 대가 어느 외딴 골목의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셜록은 주머니에서 나뒹구는 지폐를 몇 장 집어 기사의 손이 있을 법한 곳에 대충 올려둔 뒤, 택시에서 내려 짧게 심호흡을 했다. 자신은 이 곳에 목적이 있어서 온 것이었다. 모리아티의 게임에 말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게임을 자신이 이용하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셜록은 코트깃을 정리한 뒤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르비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
다소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리아티는 어제 봤었던 모습 그대로 앉아 새벽의 불청객을 맞이했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 셜록의 말을 입에서 놀리듯 굴렸다. "오-, 세르비아, 세르비아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무슨 일이 있었냐면-," 모리아티가 눈을 번뜩이며 대답하다 돌연 말을 멈추고선 셜록의 표정을 바라봤다. "그냥 알려주기엔 너무 재밌는 이야기라, 이야기값이라도 받아야겠는데."
셜록이 코트 안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모리아티의 앞에 던지듯 내려놓으며 물었다. "커닝험이 네 장기말 중 하나로 모페르튀 사건에 관여하고 있었다는 건 알아. 그런데 왜 도중에 그를 불러들여서 죽였지? 세르비아에서 네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라도 한 건가?" 모리아티는 봉투 안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그의 말을 무시하며, 자신을 노려보는 푸른 벽안에 대고 답했다.
"나는 너야. 셜록."
그가 여전히 테이블 가운데에 놓여 있는 카드패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진실은 알고 싶지 않아도 결국 찾아오게 되어 있어요. 인내심을 가져," 그가 맨 위에 있는 카드는 버리고서, 다음 장을 뒤집어 이전의 세 장의 카드 옆에 내려놓았다. 클로버 잭, 하트 5, 하트 9, 하트 10.
9-10-J가 연결되니 스트레이트가 있을 가능성도 높아졌다. 모리아티의 패 중 하나는 킹일 것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범죄 세계의 왕이라고 칭한 바 있었으니. 하지만 셜록은 자신의 카드도 모르는 상태였다. 둘 중 하나가 스페이드 에이스라는 것은 물 보듯 뻔한 일이었으나, 문제는 나머지 하나였다. 모리아티가 생각했을 때 자신의 조력자는 누구였을까. 존? 레스트레이드? 혹은 몰리? 하지만 어떻게 봐도 지금 이 패로 승산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 화려한 문양 뒤에 숨겨진 칠흑같은 어둠이 우리를 잡아먹을 거야, 셜록." 모리아티가 눈을 감고 자신 앞에 있는 이의 표정을 음미하듯 고개를 젖히며 혓바닥을 음흉하게 움직여 속삭이듯 내뱉었다.
"Because your mind is as black as the Ace of Spade, now."
'네 마음이 지금 스페이드의 에이스만큼 썩어 문드러졌거든.'
"여기에서 올인을 하지," 이것으로 그의 패가 스트레이트임이 더 확실해졌다. 킹과 퀸.
"더불어," 그가 자신의 자켓 안쪽에서 핸드폰을 꺼내 손가락 위에서 빙글 돌려 보이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섬뜩한 미소를 그렸다. "너가 그토록 원하던 내 네트워크 전부를 걸지, 이번엔 진짜야, 넌 뭘 내놓을 수 있지?"
"...Me,"
현관으로 발을 내딛자 문 손잡이가 자신의 손을 다소 부주의하게 빠져나가면서 문이 요란하게 닫혔다. 셜록은 스카프가 갑갑했는지 떨리는 손으로 풀러서 벽에 대충 걸어두고선, 계단 위로 체중을 싣자 끼익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 새벽부터 어딜 갔다 온 거야?" 현관문이 여닫히는 소리에 잠에서 깨었는지 존이 부스스한 머리를 헝크러트리며 내려오다가, 계단 중간에서 멍하니 아무런 대답도 없이 서 있는 플랫메이트를 보며 다시 한 번 물었다. "셜록..? 안색이 안좋아 보이는데," 그가 거실로 들어가려다 말고 셜록을 향해 다가갔다. "괜찮아?"
셜록이 갑자기 입을 틀어막고 존을 밀치며 플랫 안으로 뛰쳐들어가더니 화장실 변기를 붙잡고선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주체할 수 없는 어지러움과 메스꺼움 속에서 온갖 감각이 다 뒤섞여 머릿속을 헤집어놓는 듯 한 느낌에, 그는 잠시 동안 이 모든 것이 꿈이고 눈을 뜨면 사라지기를 바랬으나, 빌어먹게도 이 모든 건 현실이었고 그 현실은 금단증세의 최고치를 찍어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뒤집어졌던 속이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하자 뒤에서 존이 팔짱을 끼고선 흰 정제 두 알을 내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 그는 존이 다가 온 것 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먹어, 고집부리지 말고." 존의 말투는 마치 대여섯 살 된 아이를 꾸짖는 것 같았다. 셜록은 입에 고인 담즙을 마저 뱉어 내고선 세면대로 가서 입을 행궈낸 뒤, 알약을 받아 타들어가는 것 같은 목구멍에 털어넣고 수돗물을 아무렇게나 손으로 받아 넘겼다.
"돌아온 뒤로 약을 안했다는 말은 확실한 것 같네." 셜록이 약을 다 삼키는 것을 확인 한 뒤,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존이 말했다. "차라도 한 잔 줄까?"
셜록이 한 손으로 머리를 문지르며 긍정의 대답을 한 뒤, 자신의 몸을 거의 끌고가다싶이 옮겨서 소파 위에 엎어지듯 누웠다. "죽을 것 같아."
"30분정도 지나면 조금 살 만 할 거야. 몇일 간은 좀 쉬는게 어때." 존은 그가 자신의 제의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았지만 꿋꿋이 플랫메이트로서의 조언을 건냈다. 역시나 셜록은 그의 말은 들은 채 만 채 하며 쇼파 위에서 조금이나마 편한 자세를 잡기 위해 기다란 몸뚱아리를 이리저리 구기고 있었다. 잠시 뒤, 물이 부글대며 끓기 시작하자, 자기가 달그락대며 서로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고소하고 쌉쌀한 홍차 향이 플랫 안에 퍼졌다. 셜록은 메슥거리는 속을 부드럽게 달래주는 듯한 익숙한 냄새에 몸의 긴장을 풀고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반쯤 채워진 찻잔은 쇼파 옆 테이블에 차갑게 식은 채로 놓여져 있었다.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에 눈살을 찌푸리다 몸을 겨우 일으켜 쇼파에 등을 기댄 채 웅얼거리듯 물었다.
"...내가 얼마나 잔 거야?" 입에 남은 기분나쁜 쓴 맛이 혀 끝을 타고 느껴지자 셜록이 인상을 찌푸리며 식은 차를 들이켰다.
"몰라, 한 한시간 쯤?" 의자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던 존이 그의 물음에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답했다.
이런, 셜록이 핸드폰을 열어 메세지함을 넘겨보다 속으로 욕지꺼리를 내뱉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몇 걸음이 살짝 비틀대긴 했으나, 금새 중심을 다시 잡고선 자신의 의자 위에 놓여있는 검은 코트를 집어 다시 걸쳤다.
"존, 빨리 가야되."
"어디를?"
존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으나 셜록은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의 팔을 붙들고 일으켜 대충 위에 점퍼를 끼워넣어주고선 플랫 밖으로 끌고 나갔다. 존은 영문도 모른 채 거리 밖으로 이끌려선 택시 안으로 밀어넣어진 채로 궁시렁거렸으나, 크게 저항하지는 않았다.
"지금도 야드에선 경찰들이 열심히 용의자를 특정지으려고 분투하고 있겠지만 훨씬 더 빠른 방법이 있어." 차가 부드럽게 나아가기 시작하자 셜록이 설명을 시작했다. "아마추어 쪽을 기억하라고, 그 쪽은 마약팔이를 해서 생계를 유지하는 쪽이야. 그렇다면? 방법은 간단하지."
"마약을 사는 척 접근하겠다는 건가?" 존의 어투에는 짙은 반감이 깔려있었으나 정작 그 자신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아마 지정된 장소에 미리 물건을 놓으면 중개상이 그걸 가져가서 파는 식일 거야. 자신이 직접 팔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니까. 마침 물어보니 오늘이 회수일이라는군." 셜록은 변명 섞인 대답을 늘어놓았다.
"그건 어떻게... 아니, 됐고, 계획이 어떻게 되는데."
"아지트가 의외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을 거야. 지난 하루 동안 회수 장소 근처를 오간 사람 중에 20대에, 키 큰 남성인데, 벤치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사람이 그렇게 많이 있지는 않더군. 그 중 곧바로 집으로 들어간 사람은 더더욱." 셜록이 휴대폰으로 지도를 열어 보이며 그 위에 몇 군데를 손으로 집다가 한 곳에서 멈췄다. "하지만 가장 유력한 곳은 여기야. 지하실이 있고, 건물이 홀로 떨어져 있어서 눈에 잘 띄지도 않고, 뒷문 근처에 곧바로 지하도로 연결되는 터널이 있어서 도주에도 용의하지."
존이 그에게서 휴대폰을 받아 들며 위치를 자세히 확인하는 것을 보며, 셜록이 이어 말했다. "아마추어 쪽은 근처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야. 나간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으니 집에는 아무도 없거나, 베테랑 혼자 있다는 뜻이지."
"그러니까 지금 남의 집에 무단으로 쳐들어가자는 거구만." 존이 다시 그에게로 핸드폰을 건네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무단 침입이라니, 마약 소굴을 쳐들어가는 거지." 셜록이 미소를 지으며 반박했다. 존이 무어라 대꾸를 하려던 순간, 알람음이 그를 가로막으며 차 안에 울려퍼졌다.
"몰리야, 독극물 검사에서 바르비투르산이 나왔다는군." 셜록이 존에게 사진 하나를 보여주며 말했다.
존이 인상을 찌푸리며 글자를 읽더니 얼굴이 구겨졌다. "티오펜탈 소디움..? 마취제잖아." 그의 목소리엔 약간의 경멸이 섞여 있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한 지식을 그 반대의 용도로 사용하는 이에 대한 분노였다.
"투여량을 조절해서 자백유도를 할 때 쓰이기도 하지."
"뭔가 얻어내야 할 정보라도 있었다는 건가?"
"...세르비아," 모리아티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셜록이 중얼거렸다.
"뭐라고?"
"아냐,"
그가 대답을 흐리며 어느새 멈춰선 택시 밖으로 먼저 빠져나가자, 뒤로 존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오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개미 한 마리도 없이 고요한 골목 사이를 빠르게 헤쳐나가는 셜록의 뒤에서 존이 반쯤은 뛰어가듯 쫓아가며 그에게 속삭였다.
"범인은 이미 살인을 거리낌없이 한다는 걸 명심해."
셜록이 존의 경고를 가볍게 흘려듣고선 코트 안에서 락핏을 꺼내 뒷문에 달려있는 자물쇠에 넣고 맞춰보기 시작했다. 벌건 대낮에 이렇게 대놓고 남의 집 문을 따고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존은 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을 계속해서 훑어봤다. 1분도 채 되지 않아 자물쇠가 열리고, 셜록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선 안으로 들어갔다.
평범한, 아니 다소 낡은 축에 속하는 2층짜리 단독주택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창문마다 두꺼운 커튼이 햇빛을 가리고 있어 형광등 하나 켜져 있지 않은 집 안은 으스스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발밑에서 판자가 우는 소리만이 공간을 메우던 와중, 셜록은 복도 안쪽의, 원래는 주방의 용도로 만들어졌었던 곳을 발견하곤 조용히 감탄했다. 등 뒤에선 존이 총을 손에 쥐고 방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이제는 2층을 확인하기 위해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이미 앞에 놓인 생생한 범죄의 현장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한쪽에 쌓여있는 코데인 계열의 감기약들과, 갈색 병에 담긴 요오드계 용액들, 테이블 위에 어지럽지만 질서 있게 자리잡힌 각종 기구들. 크로코딜이라니, 생각보다 약물의 질이 매우 좋지 않았다. 방의 반대편에는 그와 다르게 꽤나 상태가 양호했다. 아마 상류층과 하층민을 각각 따로 타겟으로 두고 있는 듯, 전형적인 코카인 제조공장의 모습이었다.
순간 주머니에서 울린 알림음에 셜록은 잠깐 움찔했으나, 한 손을 코트에 넣어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 레스트레이드였다. 밤을 새워 조사관들을 굴렸는지 얼추 추려진 명단을 넘겨보다 그중 한 이름 앞에서 시선이 멈췄다. '윌리엄 커원, 54세, 약사,' 이 자가 베테랑이었다. 셜록이 빠르게 답장을 보내다 복도에서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 발소리에 말을 걸었다.
"존, 용의자 신상을 파악한 것 같-,"
아니다, 존이 아니었다. 바닥의 판자가 기울어지는 정도와 그림자로 보아 190이 넘는 장신에다가, 미세하게 가파른 호흡으로 보건대 어딘가에서 막 뛰어온 것 같았다. 범인은 2인조였다. 셜록이 근처의 약병을 집어 들려던 찰나, 둔탁한 충격음이 그의 뒤통수를 치고 지나가며 날카로운 고통이 두개골을 타고 퍼졌다. 그가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다리는 이미 힘이 풀려 무너지고 있었고, 뒤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쓰러졌다.
"...왓슨 선생님, 죄송하지만 총은 내려놓아 주시죠."
셜록은 자신의 머리 위쪽에서 울리는 앳된 목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억세게 붙잡힌 머리의 갈라진 상처에서 피어오르는 고통과 더불어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뜨뜻한 감촉으로 보아 상처가 얕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애써 초점을 맞추자 복도 한쪽 끝에서 존이 머리가 희끗하게 물들어가는 한 중년 남성의 뒤통수에 총을 겨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존은 애써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셜록은 그가 머릿속에서 가능성을 저울질하는 중임을 알았고, 그제서야 자신의 목에 닿은 서늘한 금속성의 감촉을, 그리고 그것이 주사기였음을 알아차렸다. 남자의 경고에도 존의 굳건한 자세에 아무런 미동도 없자 자신의 피부에 구멍을 낼 듯이 밀고 들어오는 따끔함이 느껴졌다.
"여기에 뭐가 들어 있는지는 선생님이 더 잘 아실 텐데요.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세요."
존의 눈썹이 일순간 꿈틀댔지만, 천천히 손을 내려 총을 바닥에 내려놓자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남자가 일어나 그들을 지나쳐 뒷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셜록은 의식이 점차 또렷해지자 존의 눈을 바라보며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자신을 거칠게 뒤로 끌고 가는 손길에 인상을 찌푸렸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들이 두 걸음 물러설 때마다 조심스럽게 존이 한 발을 다가오는 줄다리기가 반복되다, 발뒤꿈치에 문지방이 걸리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로, 죄송해요."
그 말과 함께 그는 자신의 목을 뚫고서 차가운 약물이 혈관으로 퍼지는 것을, 존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며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것을, 제 팔이 무의식적으로 저항하려 허공을 휘젓는 것을 느꼈으나, 아주 천천히, 자신의 모든 감각과 의식이 감지할 수 없는 어딘가로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끝없는 암전이었다.
쿵.
셜록은 암흑 속 세상을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암흑이 아니었다.
쿵.
"..реци..!"
셜록은 뺨에 무언가 묵직한 충격이 전해지며 고개가 제 의지와 관계없이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쿵.
"За ... радиш...!"
쿵-, 세상이 한 번 더 울리며 위아래로 뒤집혔다.
갈비뼈가 부서지는 듯한 충격과 함께 의식이 돌아와 황급히 숨을 들이쉬자 입안에 고여있던 액체에 사레가 들려 컥컥댔다. 혀 끝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불쾌한 맛에 인상을 쓰며 뱉어내려 했지만 누군가의 손이 제지하며 마저 삼키도록 했다. "활성탄이야. 다 마셔, 셜록. 해독에 도움이 될 거야." 존의 목소리가 들리며 자신의 고개가 들리더니 입안으로 기분 나쁜 용액이 다시 흘러들어왔다. 몇 번을 더 삼키고 손을 뻗어 컵을 밀어낸 뒤 호흡을 진정시키자 뿌옇게 번진 시야 사이로 존이 보였다. 피가 차게 말라붙었는지 끈적이는 뒤통수는 욱신거렸고, 심폐소생술을 하려고 셔츠 단추를 풀어놓은 건지 시린 겨울바람이 살결로 파고드는 것이 소름을 돋게 했다.
셜록이 셔츠단을 여미면서 몸을 일으키려다 휘청거리며 중심을 잃자, 존이 그의 팔을 붙잡고 다시 바닥에 앉도록 했다.
"잠시 동안 어지러울거야. 그냥 그대로 있어."
존의 표정은 한마디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심경들이 섞여 있었다. 분노, 슬픔, 놀람, 안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레스트레이드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고선 주변을 서성거리다 다시 셜록에게 다가오더니 단호한 어투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번 사건에서 손을 떼는 게 좋겠어."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냐니, 지금 그게 할 소리야?" 적어도 이 시점에서 그의 목소리에 담긴 것은 분노였다.
"너야말로 왜 그러는데, 나는 괜찮아! 사건엔 아무런 지장도 없을 거야."
"넌 실질적으로 3분이 넘게 죽어있었어! 심장이 멈췄었다고! 의사로서 말하는데 셜록, 이번, 사건에서, 손, 떼." 존의 목소리가 이제 거의 소리지르는 정도에 다다르자, 주위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던 몇몇 경찰들의 시선이 그들을 향하기 시작했다. 셜록은 머릿속을 헤집어놓을 듯 귓속에 울리는 존의 목소리가 슬슬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예민한 거야?"
"왜냐니!! 난 네가, 네가..." 존이 울컥거리는 감정에 말을 더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선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가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것에는 별다른 추론도 필요하지 않았다. 셜록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그의 앞에서 눈물을 삼키며 숨을 고르는 이를 바라보다, 조용히 말했다.
"존, 미안해."
그의 한 마디에 주변의 공기가 모두 얼어붙은 듯 일순간 적막만이 감돌았다. 제 귀를 의심하는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존과, 그에 못지않은 얼굴의 레스트레이드를 잠시 쳐다보다 힘겹게 몸을 일으켜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구급차를 향해 발을 옮기며 말했다.
"앰뷸런스 타고 가서 검사라도 받고 오면 되나? 그러지."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존이 셜록의 몸이 기우뚱 흔들리는 것을 보고 서둘러 다가가 부축했다.
셜록은 꿈을 꿨다. 꽤나 오래된 꿈이었다. 수도 없이 꿔 왔지만, 단 한번도 익숙해질 수 없었던, 사실 그가 다시 약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었다.
그 꿈은 매번 한 통의 전화로 시작됐다. 어두컴컴한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전화벨 소리에 비몽사몽한 채로 손을 뻗어 액정을 확인하면, 환하게 눈을 부시는 불빛에 눈살이 찌푸려졌음에도 검은 글씨로 적혀있는 한 단어는 똑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여전히 반쯤은 의식이 잠긴 채로 버튼을 눌러 통화를 받아, 다소 어눌한 말투로 그 이름을 불러 보지만 자신의 목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셜록, 듣고 있어? 음... 물론, 듣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너한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이 희곡에서 자신의 역할은 철저한 방관자에 불과하다.
'나는, 음, 바츠에 있어. 아마 이미 넌 알고 있을 수도 있겠네.'
존은 애써 밝게 말을 하려 하지만 자신은 그의 말투 저변에 깔려 있는 눈물과, 알코올의 흔적을 찾아낸다. 바람이 꽤 세게 부는지 지직거리는듯한 음향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네가, 큼, 나를 살리려고, 정확히는 나랑, 그렉이랑, 부인을 위해서 그랬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난...'
이 대사는 예전엔 없던 것이었는데-, 잠깐, 존-,
'정말, 정말 미안해 셜록.'
툭, 하고 무언가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울리더니 긴 침묵이 이어졌다. 멀리서 정적을 깨고 들려오는 누군가의 비명소리와, 뒤이은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곧이어 귀를 가득 매우는 앰뷸런스의 소리,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기 위해서는 굳이 두 눈으로 볼 필요도 없었다. 셜록은 수화기 너머에서 한참을 가만히 있다, 통화를 끊고선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자 낯설 정도로 새하얀 천장이 눈 앞을 가득 메움과 동시에 콧속을 자극하는 소독약 냄새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뒤통수에 거즈의 감촉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의식을 잃은 사이에 꿰맨 것이 분명했다. 그는 몸을 일으키려다 자신의 팔 위에 무언가 묵직한 것이 얹어져 있는 것을 깨닫고선 잠시 멈칫했다.
존은, 자신의 곁에 있었다. 현실에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셜록은 지난밤에 정보국으로부터 받았던, 한 서류 봉투를 열어 안에 들어 있는 종이를 빼냈다. '알렉산더 커닝험', '주요 감시 대상', 상단에 적혀 있는 글씨를 대충 흘겨보고 밑으로 시선을 내리자 그의 최근 이동 행적이 나와 있었다. 사망 당일에는 라이기트에서 런던으로 이동, 그 이전에는 특별한 움직임이 없었다가, 약 3일 전에 세르비아에서 런던으로 입국했다는 사실이 적혀 있었다. 출국 기록은 그로부터 사흘 전. 세르비아에서 머문 4일간의 행적이 비어있었다.
그는 티오펜탈을 주사 당했을 때, 정확히는 거의 죽을 뻔했을 때 보았었던 장면을 떠올렸다. 물론 약물의 작용으로 인해 호흡과 혈압이 약해지고 뇌에 적절한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 발생한 일종의 환각이었을 가능성도 있었으나, 그 기억 속 모든 공간이 너무나 생경스럽고 소름끼치게 느껴졌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реци-, 말하라니, 무얼 말하라는 거지? 셜록은 두 눈을 감고 마인드 펠리스의 복도 맨 끝에 위치한, 세르비아의 기억을 담아 둔 채로 굳게 잠긴 문 앞에 섰다. 자신이 작전 중에 붙잡혔던 적이 있었던가? 그가 손에 들려진 열쇠를 구멍에 끼워 넣고 돌리자 딸깍- 소리가 나더니 낡은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문이 열렸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살을 벨 듯한 차가운 바람이 뿜어져 나왔지만,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뼈가 시릴 정도로 매서운 추위로부터 보호해주기에는 비리로 너덜너덜해져 거의 누더기나 다름없는 꼴의 군복은 턱없이 역부족이었다. 허리춤에 매달린 38구경의 자동권총 한 자루와 어깨를 둘러싼 돌격 소총의 무게가 온몸을 무겁게 짓누르는 듯했다. 런던을 떠난 뒤로 수많은 곳을 다니며 잠입은 밥 먹듯 해 왔지만, 이렇게까지 군 수뇌부에 접근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알게모르게 긴장이 되는 듯 했다. 불현듯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안에서 장교 한 사람이 얼굴을 내밀더니 보초를 서 있던 자신에게 가까이 오라며 손짓을 해 다가가자, 손가락으로 소총을 가리키며 벗으라는 시늉을 해 셜록은 총을 벽에 기대어 세워두곤 문 안으로 들어섰다.
"...셰자라니, 세르비아와는 그닥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네요."
갑자기 들려온 익숙한 영국식 발음에 셜록이 고개를 들어 테이블 한쪽에 앉아있는 남자를 봤다. 깔끔한 포시 악센트에, 군인 출신도 아닐뿐더러, 이 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사진으로만 뵀었는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향해 악수라도 청하듯 내밀어진 손에, 셜록이 마지못해 손을 마주 잡자 그가 손가락에 힘을 주며 셜록을 바짝 끌어당겨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런 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홈즈 씨."
홈즈라니-, 제길, 셜록의 동공이 확장되며 허리춤의 총을 꺼내 대응하려 했지만 그의 악력에 붙들려 손조차 빼낼 수 없었다. 어느새 목 뒤로 닿아온 차가운 금속의 감촉과 더불어, 이미 여러 개의 총구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쾅-,
거세게 열린 방문에 순간적으로 셜록의 어깨가 움찔하며 현실 속으로 다시 붙들려 돌아왔다. 급하게 뛰어오기라도 한 건지 레스트레이드의 숨소리가 온 플랫을 다 채우기라도 할 듯 들려왔다. "그 두 명 말이야, 도망간 놈들, 방금 전에 발견됐어." 경감의 말이 정신없이 들이키는 숨 사이로 끊겨서 나왔다.
"죽은 채로 발견됐군요." 그가 여전히 두 눈을 감은 채로 무심한 듯 내뱉었다.
"...어떻게 알았-"
"존."
불현듯 셜록이 눈을 뜨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플랫 안을 샅샅이 뒤지면서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부엌에도, 2층 침실에도, 화장실에도, 플랫 안에는 아무도 없는 정적만이 가득했다.
"존은 어디 있죠?" 셜록이 경감에게 소리쳤다.
"병원에서 자네랑 같이 온 거 아니었나?" 경감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인지조차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말이 통하지 않을 수가! 셜록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와 인상을 찌푸리며 양 손을 머리 옆에 두고선 빠르게 정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모리아티는 설령 그것이 아군이더라도, 자신의 계획을 어그러트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커닝험은 세르비아에서 자신의 위장을 발각시키고 위험에 빠트린 죄로 죽었다. 두 마약상은 더 말할 것도 없이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존은? 아-, 일순간 셜록의 머릿속에 존이 아침에 주었던 두 알약이 스쳐갔다. 부프레노르핀과 날록손. 주사기 속에 들어있었던 티오펜탈은 치사량이 아니었다. 다만 이미 체내에 흡수되었던 부프레노르핀이 문제였다. 두 성분이 섞여 중추신경계가 예상보다 과도하게 마비되어 호흡 억제가 일어난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도달하자 셜록은 어벙하게 서 있던 레스트레이드를 밀치고선 플랫 밖으로 뛰쳐나갔다.
"존은 어딨어,"
셜록이 성큼성큼 발을 내딛자 구두굽 소리가 시멘트 바닥과 맞부딪치며 텅 빈 건물 안에 울려퍼졌다.
"존은 어딨냐고!"
그가 모리아티의 멱살을 붙잡고 의자에서 들어올리듯 힘을 주어 끌어당기며 소리쳤다.
"워어어-, 우리가 게임 중이란 걸 명심해." 그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자신의 셔츠 칼라를 붙잡은 셜록의 손을 힘주어 떼어냈다. "한마디 보태자면, 네 조니보이는 아주 잘살고 있으니까 걱정 말아."
구겨진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모리아티가 다시 의자를 당겨 앉으며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셜록은 내키지 않았으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지가 몇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폭발하는듯했던 감정이 조금씩 가라앉고, 분노로 널뛰던 이성이 빠르게 돌아가며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존이 자신의 패가 아니라, 자신이 이 게임에서 걸어야 할 것이었다면 이제 남아있는 것은 뻔했다. 스페이드 킹, 골리앗을 무찌를 왕.
또다시 카드가 한 장 옆에 버려지고, 마지막 한 장이 뒤집어졌다. 스페이드 퀸.
셜록이 가슴 속 차오르는 승리의 기쁨을 애써 억누르며 자신의 카드 두 장을 뒤집었다. A-K-Q-J-10, 스트레이트 중 가장 높은 마운틴 스트레이트, 자신의 승리였다. 존은 무사할 것이다. 어차피 이 게임에 걸린 모든 것이 자신의 차지가 될 것이니.
"미안하지만 셜록, 사실 네가 졌어."
모리아티가 얼굴에 가식적인 안쓰러움을 띄우며 입꼬리를 극적으로 내렸다.
"진실을 외면하고 싶은 거야, 아니면 정말로 몰랐던 거야? 존을 만나서 모든게 잊혀질 정도로 너무 기뻤나?"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울려퍼질 때 마다 텅 빈 건물이, 아니, 어느 지하실이, 아니... 애초에 런던에 이런 곳이 있었던가?
"넌 너무 평범해졌어," 모리아티는 이제 거의 자신을 향해 혼내듯 소리치고 있었다. "이제 지루하다고!"
셜록은 그의 입에서 빠져나온 말들이 공간을 타고 제 고막을 진동시키는 것을 인지했지만, 엄밀히 말해 자신의 뇌는 그 신호를 해독하지 못했기에, 듣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정확했다.
"왜냐면 여기에 진실 따위는 애초에 없었거든."
그의 품 안에서 권총이 꺼내져 미간을 조준하는 것을 보고도,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방아쇠를 당기기 전의 아주 짧은 순간, 셜록은 221B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세웠었던 첫 번째 가설을 떠올렸다. 자신은 현재 꿈을 꾸고 있다.
탕-
총성과 함께 내려치듯 돌아온 의식에 숨을 거칠게 들이쉬자 쪼그라들었던 폐가 팽창하며 들어찬 차가운 공기에 고통스럽게 경련하는 것이 느껴졌다. 폐 속에 서리가 맺힐 것 같은 차가움에 콜록거리자 공중에 새하얀 입김이 뭉쳐졌다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반 나체나 다름없는 누더기 차림으로 있기엔 이곳은 너무나 추웠고, 제대로 된 난방조차 없는 것 같았다. 세르비아였다. 셜록은 핏방울이 맺힌 채 부풀어있는 왼쪽 눈꺼풀 대신 반대편 눈을 힘겹게 들어올리고선 주변을 관찰하며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아무런 불빛도 없이 을씨년스러운 어둠이 가득 메우고 있었으나, 두세 평 남짓한 작은 내부였기에 눈동자만 한 바퀴 돌려보아도 이곳이 자신이 갇혀 있었던 어느 창고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근처에는 엄숙한 고요만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철제 벽 너머 약 80미터가량 떨어진 부근에서 두세 명의 남성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피부를 할퀴듯 때리고 지나가는 한기에 셜록이 고개를 들어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돌렸다.
낡게 녹슨 문은 열려있었고,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손목을 묶고 있던 매듭은 다행히도 헐거워진 상태였다. 끈을 풀고 몸을 힘겹게 일으키자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싸구려 주사기들이 발에 치였다. 근처 의자 위에 얹어져 있는 낡은 군용 점퍼 하나에 대충 팔을 쑤셔 넣고, 침착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달려, 셜록, 달아나
너의 맨발이 네가 내딛는 걸음마다 얼어붙은 땅의 나무가시에 찢겨 붉은 발자국을 남길지라도, 너의 숨이 해안가에 몰아치는 파도처럼 네 턱 끝까지 차올라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을지라도,
도망쳐, 셜록
셜록은 뛰기 시작했다.
* SHERLOCK(BBC) 203과 301 사이를 모티브로 짜여졌습니다. 정확히는, 301의 세르비아에서 도주하는 장면의 직전 상황입니다.
* 그 외에 스토리 구상에 참고한 것들:
셜록 홈즈의 회상록 - 라이기트의 수수께끼
드라마 House M.D. Season 2 Episode 24
* 좋은 소재를 제공해 주신 주최자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